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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요즘 가장 금기시되는 말인 꼰대들의 전용 멘트. 사회 전반에서 밈(Meme)이 파다할 정도니 ‘진짜 꼰대’라면 이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됐다. 자동차업계의 터줏대감들이 본격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했다. 도로 위 풍경과 자동차 문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

2020.06.18

 

세상 참 좋아졌어

나 때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운전면허를 딴 것이 1971년이었어. 거리에는 신진 코로나, 현대 코티나 같은 몇 가지 4도어 세단뿐이었지. 스포츠카 따위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사치품이라 감히 꿈꿀 수 없었어. 몇 가지 안 되는 국산차는 모두 녹다운 방식으로 조립된 외국차였어.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각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들여왔기에 괜찮은 차들이었다고. 코로나는 일본에서, 코티나는 영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 모델이었어.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었지. 웃기는 건 소형차 크기의 세단도 운전기사를 둔 거야. 운전기사는 운전을 하고, 집안 심부름을 하고, 차를 닦고, 또 정비도 했어. 덩치 큰 사람은 운전기사로 취직이 힘들었는데, 이유는 대부분 차의 앞자리가 벤치 시트라 운전석과 조수석이 붙어 있어 덩치 큰 기사가 시트를 뒤로 밀면 사장님 자리가 좁아지기 때문이었어. 또 덩치 큰 사람은 부리기도 쉽지 않았을 거야.

 

차들은 기계적으로 고장이 많았어. 서울에서 대전까지, 당시 막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 길가에 고장 나 수리하는 차 다섯 대 이상은 볼 수 있었어. 심지어 길가에서 프로펠러 샤프트를 들어내는 차도 보았어. 그럴 때 운전기사는 어떻게든 문제를 풀었지. 당시의 수리는 부품을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부품을 갈고닦아 다시 써야 하는 거야. 나중에 세월이 흘러 부품을 갈아 끼우게 되니까 버리는 부품이 엄청 아깝더라고. 그때는 타이어 펑크도 잦았어. 나는 타이어를 몇 분 만에 갈아 끼우는 실력의 소유자였지. 요즘은 타이어 펑크도 보험사 불러 처리하는 세상이니 할 말은 없네. 아, 요즘 차는 스페어타이어도 없던가?

 

우리 집 운전기사는 나에게 온갖 운전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어. 예를 들어 철도 건널목에서 차가 고장 나면 일단 차를 옮겨야 하잖아. 그럴 때 시동모터를 계속 돌려 ‘끼이이잉’ 하고 차를 강제로 굴리는 거야. 비상 탈출하는 거지. 물론 그때는 자동기어가 아니어서 이런 방법이 가능했어. 그때 모든 차들은 스티어링 칼럼에 수동기어 레버를 달았거든.

 

71년형 뉴 코티나가 나올 때 운전석과 조수석이 나뉘고, 그 사이로 연탄집게 같은 꼬챙이 모양의 기어 레버가 바닥에 꽂혀 있더라고. 내 눈에는 이보다 멋진 스포츠카가 없었어. 평범한 4도어 세단에서 스포츠카를 본 거야. 자동차를 좋아한 청년이 가질 수 있는 차는 없었어. 국산 고유 모델이 하나도 없던 시절, 난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몰랐어. 돌이켜보면 요즘 세상은 참 꿈만 같은 거야.

글_박규철


 

옛날 도로에는 사람 냄새가 났지

옛날에는 따뜻한 배려들이 있었어. 사람 냄새가 많이 났지. 그게 제일 그립네.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해 볼게. 나는 옛날에는 신장이라고 부른 지금 하남시에서 천호동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녔어. 천호시장 근처에 있던 종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지. 그때 시외버스는 엔진이 앞에 있고 앞에서 3분의 1 위치에 문이 하나만 있었어. 그래서 솟아오른 엔진 커버를 사이에 두고 운전기사 아저씨와 나란히 맨 앞줄에 앉을 수 있었어. 내가 버스를 운전하는 기분이 난 거야. 지금은 그러면 혼나겠지만 그때는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아저씨가 나와 놀아주신 것이었겠지만) 신나게 다녔어.

 

기사 아저씨는 사탕이나 캐러멜도 주고 가끔은 박카스도 줬어. 카페인이 들어 있어 집에서는 못 먹던 것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저씨가 졸음을 쫓기 위해 갖고 있던 것이었을 텐데 그 소중한 걸 나눠줬어. 또 같은 노선의 버스를 길에서 만나면 기사 아저씨들은 한 손을 들어 서로 인사를 했어. 그게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나는 동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탈 때마다 수십, 수백 번이나 서로 스쳐가며 손인사하는 흉내를 냈어. 그만큼 정말 멋졌거든.

 

시외버스엔 차비를 받던 안내양 누나가 있었어. 승객들이 모두 타면 버스 옆면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 번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는 누나들이 <은하철도 999>의 메텔처럼 보였어. 누나의 손바닥에 커다란 버스가 움직이다니!

 

언젠가 한번은 버스에서 잠이 들었던 거야. 하남시에서 내려야 했는데 눈을 떠보니 모르는 동네였어. 알고 보니 남한산성 근처까지 와버린 거지. 나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안내양 누나가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줬어. 내가 냈던 차비 20원을 도로 주면서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랬어. 집에 잘 돌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주며 내일 또 만나자고 했어. 그때 내 눈엔 미스코리아보다 예뻤어. 나이팅게일이고, 천사 같았지.

 

꼬마는 어느덧 중학생이 됐고 서울로 이사했어. 서울엔 길도 많고 차도 많고 사거리도 많았는데 밤에 버스를 타면 흥미로운 것이 있었어. 차들이 신호등에 걸리면 다들 전조등을 끄는 거야.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이유를 물었어. “건너편 운전자가 눈이 부실 수도 있잖아.” 그때 운전기사들이 중세 기사처럼 근사했어. 그래서 ‘기사’라고 부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요즘 보복운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 서로 대화하고 배려하던 도로의 기사들과 나이팅게일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글_나윤석(자동차 칼럼니스트)

 

 

자유로가 귀신만 출몰하는 곳은 아니란 말이야

199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 전문 매체에 시승기를 쓰기 시작한 내가 시승을 위해 자주 찾던 곳은 자유로였어. 자유로는 한강과 임진강 하류를 끼고 서울 난지도와 경기도 파주 임진각 사이를 잇는 자동차전용도로야. 휴전선에 인접한 경기 북동부가 미처 개발이 되지 않던 시기에, 홍수 예방을 위해 대규모로 지은 제방 위에 넓은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들었으니 한적하기 그지없었지. 과속 단속 카메라도 많지 않았고 단속도 심하지 않아 길 이름에 들어간 ‘자유’란 단어가 속도 제한으로부터 자유를 떠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야.

 

때마침 성동 IC 부근에 만들어진 통일전망대 인근에 이른바 통일동산이 조성되고 있었어. 구획을 정리해 도로를 깔아놓았지만 시설이 들어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 텅 빈 도로가 넓게 깔려 있으니, 운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차로 이것저것 시도하기도 좋았어. 특히 ‘통동 드래그’는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 아주 유명했지. 당시 자동차 튜닝 문화가 한창 폭을 넓히고 있었고 PC통신, 무선호출기와 휴대전화라는 통신 수단이 등장했어. 자유로와 통일동산이 자동차 마니아들의 성지이자 모임 장소가 된 거야.

 

평범한 경차를 몰던 나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종종 구경하러 갔어. 구경꾼은 나 말고도 많았어. 어쩌다 많은 사람이 모일 때는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하는 차들만 수십 대, 모이는 사람은 1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지. 새로 나온 차를 사거나 새로운 튜닝 작업을 한 차들은 한 번쯤 들르는 이벤트였어.

 

물론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 일반 도로에서 하는 이벤트는 불법이야. 경찰차가 출동하면 서둘러 각자 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도 장관이었지.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자유로와 통일동산을 꾸준히 찾는 마니아들 덕분에 한동안 튜닝업계가 호황을 누리기도 했어. 그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으며 한풀 꺾였고, 그 뒤로 자유로 주변이 빠르게 개발되고 교통량이 늘면서 차츰 사그라졌지.

 

자유는 때론 방종이 되기도 하고, 선을 넘건 넘지 않건 일탈에는 종종 부작용이 따라. 자유로에서는 심심치 않게 대형 교통사고가 났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어. 남 일만은 아니야. 내 친척 동생 한 명도 자유로에서 일어난 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 운전이 주는 재미, 속도가 주는 쾌감도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해.

 

그럼에도 여전히 심야의 자유로를 달리면 총알처럼 추월해 지나가는 차들을 쉽게 만날 수 있어. 늦은 밤에 자유로 휴게소에 들르면 화려하게 치장한 차들이 삼삼오오 모인 모습이 수시로 눈에 띄기도 하지. 차 주변에는 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가 끝나면 각자 차에 올라 요란한 배기음을 남기며 줄지어 자유로로 빠져나가. 그 모습을 보면 옛날이 떠올라. 그러고 보면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 차를 즐기는 방식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글_류청희(자동차 평론가)

무쏘라고 들어봤나?

나 때는 말이야, 지금보다 자동차가 훨씬 더 분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어. 자동차가 팔리는 대수가 훨씬 적고 모델도 적었지만 어떤 차를 타는 사람은 ‘OOO하다’라고 단번에 이야기할 수 있었어. 어떤 모델을 타느냐가 운전하는 사람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기였으니까.

 

예를 들어볼까? 1980년대 후반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공식 마스코트였던 호돌이라고 들어봤나?) 한국의 경제는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고. 1985년에 처음으로 등록대수가 100만대를 넘었는데, 불과 3년 만인 1988년에 200만대가 됐어. 당연히 집마다 자동차 한 대쯤 있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거야. 당시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나 대우자동차 르망, 기아자동차 프라이드는 말 그대로 보급형 승용차라 많은 사람들이 사는 차였어.

 

이렇게 차를 산 사람들이 무엇을 했을까? 새 차도 생겼겠다 주말이 되면 다들 산으로 들로 놀러 나갔겠지. 그런데 막상 도심을 벗어나니까 많은 시골길들이 비포장도로였고 한적한 곳으로 가려면 애들 머리만 한 돌을 넘어야 할 일들이 빈번했어. 당시 험로를 달릴 수 있는 네바퀴굴림 SUV들은, 만약 우리나라에 전쟁이 나면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징발 대상이었다고. 덕분에 일반 승용차의 특별소비세가 차값의 25%였는데 SUV는 10%밖에 되지 않았고, 자동차세도 매우 저렴해서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한 거야. 그 시점에 1991년 현대정공에서 내놓은 갤로퍼는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지. 그런데 그때까지 국내 SUV 시장을 이끌던 쌍용자동차가 가만있었겠냐? 벼르고 별러 준비한 차가 무쏘였어. 영국의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인 켄 그린리 RCA(Royal College of Art) 교수가 만든 디자인은 그때까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투박한 네모 박스 모양이던 SUV에게 큰 충격을 안겼어.

 

갤로퍼와 무쏘의 경쟁은 TV 광고에서도 어떤 이미지인지 잘 드러났어. 전통의 갤로퍼가 주로 돌길을 달리고 물을 헤치며 모래언덕에서 점프를 하는 광고를 내보낸 반면 무쏘는 오페라, 현악 4중주와 함께 유럽의 어느 성을 연상시키는 도로를 조용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매우 우아한 모습이었거든. 그래서 갤로퍼를 타는 사람은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이, 무쏘를 타는 사람은 커피 광고에 나오는 안성기의 이미지로 이어졌다고.

 

옛날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 SUV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씁쓸해져. 다들 패밀리 SUV의 안전을 이야기하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이야기할 뿐, 갤로퍼처럼 터프한 또는 무쏘처럼 샤프한 운전자를 말하지는 않거든. 어떤 국산 SUV라도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릴 때, ‘아! 저 사람은 차와 참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차가 없다는 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난한 차가 많이 팔리겠지만 개성 강한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쉽다는 말이야.

글_이동희(자동차 칼럼니스트)

 

 

자동차 동호회가 최고의 자동차 문화였지

15~20년 전엔 자동차 동호회가 굉장히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잘 발달했었어. 한 개의 차종에 여러 개의 동호회가 있었고, 각 동호회는 암암리에 경쟁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지. 현대 쏘나타 등 많이 팔리는 차종의 동호회는 규모가 꽤 컸는데, 전국구 조직 밑으로 하위 지역구가 있었고 지역장이 각 지역을 담당했어.

 

당시에는 자동차 문화라는 것이 흔치 않았기에 자동차 동호회는 한국의 자동차 문화를 대표하는 콘텐츠 같은 거였어. 같은 차를 타는 오너들이 온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오프라인 모임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온·오프라인이 병합된 건전한 자동차 문화였지. 특히 오프라인 모임이 재미있었어. 지역장의 주도로 지역 모임이 종종 열렸는데, 여기서 마음에 맞는 회원들은 주말이나 퇴근 후 자주 만났거든. 그들끼리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결혼까지 골인하는 경우도 있었어.

 

오프라인 모임에선 서로의 차를 관찰하며 참신한 DIY 정보를 얻기도 했어. 멋지게 드레스업된 차는 카메라 세례를 받고 차주는 질문과 관심의 대상이 됐지. 그런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차는 따로 있었어. 바로 젊은 아가씨가 타고 온 차야. 수컷들이 캔 커피 등을 조공하며 그녀의 윈도 브러시를 갈아주려고 했어. 원하지도 않는 동호회 스티커를 트렁크에 붙여주고, 필요도 없는 방향제를 선심 쓰듯 내주며 관심을 갈구한 거야.

 

여러 대의 차가 모이면 꼭 이런 차가 있었어. 코바늘로 정성스럽게 짠 뜨개질 시트커버는 애프터마켓에서 절대 구할 수 없는 희귀템이었지. 흰색의 꽃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인 시트는 실내를 고급스럽게 가꿔주는 소품 이상의 작품이었어. 여름엔 왕골이나 나무 구슬을 엮어 만든 시트가 필수였어. 지금처럼 통풍시트 기능이 없었거든. 왕골은 미끄러워서 계속 고쳐 앉아야 했고, 구슬 시트는 오래 앉으면 엉덩이에 구슬 멍이 들기도 했어. 그래도 엉덩이에 땀띠가 생기는 것보다 나았지. ‘엉따’가 없는 겨울엔 양털 시트커버가 최고였어. 하지만 흰 털이 옷에 너무 많이 달라붙는 바람에 이듬해엔 버리거나 남에게 주곤 했지.

 

2열 뒤엔 대나무 바구니에 모과를 넣고 다니는 차가 많았어. 나도 20대에 모과를 싣고 다닌 적이 있거든. 생각해보면 모과는 당시 오너드라이버들의 통과의례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모과는 천연 방향제 역할을 톡톡히 했어. 하지만 안전하진 않았지.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그 단단한 것이 운전석까지 날아오곤 했으니까 말이야.

 

나 때는 동호회가 최고의 자동차 문화였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어. 올해 차를 바꿀 예정인데, 예전처럼 동호회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 늙었다고 안 받아주거나 괄시하진 않겠지?

글_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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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장은지PHOTO : IMDb(영화), 일러스트레이션(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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