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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포크의 세계

패션, 가전, 자동차, 금융. 분야를 막론하고 ‘비스포크’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 시대의 산업 트렌드인 비스포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2020.07.23

 

비스포크(bespoke)는 ‘Been spoken for(~에 대한 이야기)’의 줄임말로, 소비자가 ‘말하는 대로’ 제작해주는 맞춤형 생산 시스템이다. 디지털 세대에게 친숙한 언어로 변환하자면 ‘사용자 정의’ 같은 거다. 언뜻 새롭게 들리지만 맞춤형 양복, 맞춤형 구두가 있는 패션업계에서는 보편적인 단어다. 비스포크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580년대로 추정된다. ‘장인’의 개념이 생긴 중세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복이나 가구 등의 ‘사치재’는 장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맞춤 제작이 당연했다는 말이다. 완성품·기성품이 주류가 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다.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노동의 권위는 축소되고 장인의 자리는 위태로워졌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원리 아래 기업은 생산품당 평균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소비자는 기업이 제시하는 한정된 가짓수의 품목을 빠른 시일 내에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온라인 B2B 거래 플랫폼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은 “과거에 같은 옷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옷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관건”이라 말한다. 오늘날 시장의 흐름을 결정하는 소비 주체인 밀레니얼 세대는 개성이나 경험 같은 감성적 만족을 높게 산다. 이들에게 편리하고 합리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남과 구별되는 ‘자아 표현’ 같은 심리적 만족은 그것보다 상위에 위치한 가치다. 나에게 꼭 맞는 상품을 구매하고자 이들이 높은 비용과 시간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몇 년 사이 산업 전반에서 ‘비스포크’가 눈에 띄게 등장한 것은 기업이 소비 집단의 성격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그게 가능해져서다. 예를 들어볼까. 삼성전자의 비스포크 냉장고는 냉장고 문의 색상과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물론, 1도어부터 4도어까지 구성과 얼음 칸, 김치냉장고 칸 등의 기능도 집집마다 사용 패턴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 이로써 비스포크 냉장고는 주방 인테리어에 보다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고, 새로운 유형의 가족이 출현하고 있는 현대에 적절한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사실 비스포크 디자인은 삼성전자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되고 있었지만 정작 출시되기까지엔 5년이 걸렸다. 2만2000개의 조합 중 소비자가 선택한 하나의 제품을 며칠 안에 배송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삼성전자는 전 부서에서 각출한 팀원들로 태스크포스(TF) 팀을 조직해, 주문 즉시 조립하는 생산 라인과 유통 및 사후 서비스 채널을 마련했다. 주문과 생산이 거의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만큼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디자인이나 기능을 추가하거나, 위기를 바로잡는 ‘대응’이 필수다. 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렇듯 정밀한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탓에, 비스포크가 주는 ‘특별함’의 대가는 고스란히 높은 비용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명품 브랜드나 프리미엄 상품에서 비스포크란 말을 자주 만난다. 완성차 판매가 일반적인 자동차업계에서 비스포크 디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는 롤스로이스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스포크는 롤스로이스의 주요 판매 전략 중 하나였다. 롤스로이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초호화 롤스로이스를 구매할 때, 단순한 개성 표현을 넘어 자신만의 직관과 상징을 담길 원한다고 판단했다. 실제 롤스로이스 오너는 세상 단 하나뿐인 외장 컬러부터 가죽이나 나무, 양모 같은 실내 인테리어 소재를 선택할 수 있다. 헤드레스트에 기업 로고나 가문의 상징을 수놓거나 천장에 별자리도 새길 수 있다. BMW 또한 ‘인디비주얼 오더’를 통해 고객 맞춤형 자동차를 제공한다. 높은 추가 비용과 기다림을 감수한다면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외장 컬러나 내장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브랜드에서는 제네시스가 ‘유어 제네시스’란 비스포크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제네시스는 자사 최초의 SUV 모델 GV80부터 이 프로그램을 접목했다. GV80 출시 당시 엔진, 시트 배열, 외장 컬러, 휠 등 하나부터 열까지 옵션을 선택해야 하는 점이 의아하단 반응이 많았는데, 바로 비스포크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비스포크가 소비자에게 오히려 혼란을 주고, ‘선택의 역설’(선택지가 많을 때 결과적으로 실망스러운 선택을 하게 되는 현상)에 빠지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브랜드에서 인기 있는 조합을 유도하고(제네시스에서도 인기 편의사양을 모은 패키지 상품을 제안한다), 요즘 소비자들이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 직관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자동차 브랜드나 가전처럼 완성품이 당연했던 분야에 비스포크가 도입되는 현상은 비스포크 트렌드의 긍정적인 효과다. 문제는 고객의 정보를 분석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금융 서비스처럼 맞춤형이 일반적인 분야까지도 비스포크를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맞춤형’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비 모델이 아니다. 맞춤형 여행 패키지, 맞춤형 보험, 맞춤형 임플란트가 이미 익숙하고, 패션과 리빙 업계에서는 ‘커스터마이징’이 비스포크 이전에 유행한 마케팅 용어였다. ‘비스포크’는 몇 년 전 미국을 한 차례 휩쓴 바 있다. 당시 너도나도 비스포크를 남발하는 것에 기시감을 가진 미국의 영화감독 폴 리치오(Paul Riccio)는 2015년, 이를 풍자한 단편영화 <더 티미 브라더스-워터 메이커스>를 제작했다.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자칭 ‘물 장인(Water Artisan)’ 티미 형제는 영혼 없는 대기업의 물이 아닌 미시시피 강물, 폰 차트 레인 호수의 물 등 고객 맞춤형 물을 제공한다고 광고했다. 폴 리치오 감독은 영화가 개봉된 후 유럽으로부터 영화 수입 문의보다 비스포크 물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가 많았다며 허탈해했다. 얼마 후 <뉴욕 타임스>는 이 일화를 인용해 “B 단어(비스포크)는 단지 이름이다.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출판사, 외과 의사, 포르노그래피에서 사용하는 일명 ‘마케팅 미끼’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실었다. 심지어 토핑을 빼거나 추가할 수 있는 버거킹을 두고 ‘비스포크 식당’이라 칭한 양심 없는 푸드 블로거를 비롯해, 비스포크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기업과 미디어를 비판한 것이다. ‘여기도 비스포크, 저기도 비스포크, 이제는 충분해!’란 기사의 제목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비스포크 광고에 질렸는지 알 만하다.

 

과거 영국 상류층에서 슈트 제작에 쓰던 표현인 ‘비스포크’는 ‘맞춤형’이나 ‘커스터마이징’과 의미는 통하지만 그보다 고상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소비자로 하여금 취향을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하고, 일부 기업에겐 아무 원성도 사지 않고 비용을 얹는 빌미가 된다. 물론 좋은 측면도 많다. ‘비스포크’가 산업 전반의 주목을 받으며 다양한 완성품 브랜드에서 도입을 모색하고 있고, 이는 결국 소비자에게 폭넓은 기회를 열어준다. 자신에게 꼭 맞는 상품을 소유하는 것은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니 비스포크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알아서 취할 건 취하고 거를 건 거르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단어에 현혹되지 않는 변별력 있는 소비다. 지나친 비관도 낙관도 없이 기어를 중립에 둔 채, 언제 밟고 멈출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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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장은지PHOTO : 마이자(일러스트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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