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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모빌리티의 모습은?

미래는 어떤 삶이 보편화될까? ‘이동 수단이 곧 집인 노마드 라이프 VS. 집은 있되 자차가 없는 공유 모빌리티 라이프?’ 4인의 필자가 미래 모빌리티의 모습을 예측했다

2021.07.12

 

자동차로 출퇴근하던 내가 과연 차 없이 살 수 있을까?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이 부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호찌민에는 아직 지하철이 없다. 버스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중교통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이다. 

 

호찌민에 온 지 5개월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이런 고민은 하지 않는다. 차가 없어도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그랩’ 앱 하나만 깔려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아들의 학교를 갈 때도, 시장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그랩만 열면 갈 수 있다. 더군다나 차 대신 오토바이를 선택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다.

 

집에서 아들의 학교나 아내의 회사를 갈 때 드는 비용은 약 1만3000동, 우리 돈으로 600원 정도로 우리나라 버스나 지하철 가격보다 싸다. 아무튼 이 도시에 살면서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도 ‘아무래도 차 한 대 사야겠군’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 같다. 모두 공유 모빌리티 기술 덕분이다. 

 

차 살 돈을 절약한 대신, 집은 한국에서 살 때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해서 구했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수영장과 사우나, 피트니스 시설은 물론 어린이 놀이공간까지 갖추고 있다. 차를 사는 대신 좀 더 나은 집에서 살기로 한 결정에 대한 우리 가족의 만족도는 무척 높다. 

 

최근 영화 <노마드랜드>를 보면서 잠시 이런 상상을 해봤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집 대신 차에서 먹고 자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나의 대답은 ‘미션 임파서블!’ 영화에 나오는 노마드의 삶은 미국처럼 땅덩이가 넓은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하룻밤 주차할 공간을 찾다가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말 것이다.  

 

난 군 생활 중 ‘유사’ 노마드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의무병이었는데, 같은 의무중대의 다른 동료들처럼 병원에서 하얀 가운 입고 생활하는 의무병이 아니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여러 훈련장을 떠도는 야전 의무병(Field Medic)이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넘게 앰뷸런스 안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아무리 침낭 안이라고 해도 한겨울 밤의 잠자리는 너무도 추웠다. 물티슈로 몸을 닦는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만 지나도 ‘단 1분의 샤워’가 정말이지 절실해졌다. 현대판 유목민의 삶도 당시 내 군대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1년에 한두 번이면 모를까, 남은 삶 전체를 이렇게 사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군대 시절과 비교하다니, 너무 극단적인 비유 아니냐?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으리라. 샤워실과 화장실을 갖춘 꽤 고급 캠핑카를 타고 여행한 적도 있는데, 키 186cm의 내게 캠핑카 내 샤워실과 화장실은 너무 비좁았다. 5평짜리 원룸에 살더라도 내 집에서 씻고 볼일 보는 게 훨씬 마음 편한 건 자명한 일이다.  

 

<노마드랜드> 개봉 이후, 유목민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이라며 노마드 라이프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생각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런 삶을 꿈꾸었다. 그때 왠지 그런 삶이 낭만적일 것 같았다. 

 

실제로 미국에는 이렇게 RV나 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방랑자의 삶을 선택한 게 아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길 위의 삶에 내몰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가족이 없는 싱글(그중에서도 노년층)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나도 인생의 끝이 다가올 무렵이면 노마드의 삶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자식이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단호하게 ‘노(No)’다. 오직 집만이 가족의 아늑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밴에서 먹고 자는 삶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이는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싶어 하는 본능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최첨단 장비를 갖춘 밴이 나오더라도 집이 아닌 차에서 자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그칠 것이다. 

 

결국 미래에도 거주지는 필수일 것이다. 반면, 공유 모빌리티 서비스의 발달로 자동차 없는 삶은 점점 대세가 될 것이다. 밴이나 RV를 타며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대자연을 느끼는 삶, 좋다. 하지만 이런 노마드 라이프는 일주일이나 한 달, 아무리 길게 잡더라도 1~2년이면 족하다. 덤불 속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공중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계곡물로 목욕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이 일상이 된다면 금세 아늑한 집이 그리워질 것이다. 
김면중(에세이스트)

 

 

모빌리티 노마드가 가능할까?

노마드란 단어는 낯설지 않다. 디지털 노마드 역시 많이 들어봤다. 일할 장소에서 자유로워진 삶. 인터넷과 IT 기기가 발달하며 생긴 사회상이다. 유목민이란 뜻의 노마드는 간단한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주창한 현대 철학의 개념에 등장하는 단어다. 단지 공간 이동만이 아닌 불모지에서 새로운 땅으로 바꿔나가는 창조적 행위가 노마디즘, 즉 노마드에 담겨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탐구하는 삶의 방식이랄까. 디지털 노마드는 그 하나의 파편으로 대두된 현상이다. 

 

노마디즘의 개념에서 확장해보자. 일할 장소만이 아닌 거주하는 지역의 자유. 달리 말하면 사는 곳의 이동성. 집과 땅이라는 전통적 가치에서 탈피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봤다. 작년 미국에서 요트 노마드를 택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내용이었다. 팬데믹을 피해 집 대신 요트에서 생활하는 삶. 팬데믹의 공포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할 용기를 품게 한 셈이다.

 

요트 노마드를 택한 사람은 바닷길 따라 사는 지역을 달리하며 항해하다가 정박한다. 단지 여행이 아니다. 여행도 스미겠지만, 요트에서 살아가는 삶이 중심이다. 재산과 삶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진 결과다. 무엇보다 요트에서 살아가려면 미니멀 라이프는 필수니까. 이동과 주거가 공존하는 삶의 방식. 노마디즘으로 바라보면 삶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셈이다. 

 

요트 대신 자동차를 대입해도 말이 될까? 지금도 캠핑카에서 사는 사람은 있다. 물론 방송 프로그램의 섭외 대상일 정도로 특이한 경우다. 하지만 미래에는 다를 수도 있다. 자율주행 시대가 완전하게 자리 잡은 세상은 분명 지금과 풍경이 다를 테다. 그때 자동차는 두 가지 방향성으로 전환할 거다. 버스나 지하철처럼 대중교통 수단이 되거나, 아예 다양한 가능성에 집중한 공간으로 변모하거나.

 

후자라면 자동차의 공간성은 무한해진다. 급기야 하나의 집처럼 활용할 여지가 생긴다. 모빌리티 노마드가 하나의 흐름으로 대두할 수 있다. 게다가 작금의 사회는 양극화와 개인화로 치닫는다. 미래라고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양극화와 개인화가 증폭할수록 미래는 지금과는 다른 독특한 사회 풍경을 그릴 수 있다. 

 

요트 노마드를 택한 사람처럼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 소유하는 데 드는 노력을 줄이고 자기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구비하는 흐름. 이때 자동차는 이동성과 공간성을 모두 획득한 존재다. 모듈형 자동차는 공간을 다채롭게 선사하고, 자율주행은 이동에 들이는 수고를 줄인다. 효율적이면서 합리적이다. 물론 가치관이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시대상은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다.

 

양극화가 심화하면, 소유까지 이르는 벽이 더욱 높아지면 자의든 타의든 쓸려간다. 지나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변화가 노마디즘으로 승화할 수도 있다. 이동과 거주가 공존하기에 어떤 창조적 생활상이 태동할지 모른다. 모빌리티 노마드가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멀고 먼 미래 얘기지만, 마냥 상상만은 아니다. 
김종훈(자동차 칼럼니스트)

 

저 푸른 초원 위에 더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집과 자동차의 본질은 각각 거주와 이동일 것이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선택지 중 내가 ‘더 못 견디는 상태’에 돌입하는 옵션은 어느 쪽일까? 선택은 ‘했을 때 나아지는 것’의 영향력보다 ‘없을 때 큰일 나는 것’의 변수가 더 크다. 삶은 현상 유지만으로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보다 나쁜 삶에 대한 공포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명확한 질문. 집이 없는 삶과 자동차가 없는 삶 중 어느 쪽이 더 절박할까?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다. 집이 있고 내 소유의 자동차가 없는 삶과 자동차만 있고 집이 없는 삶 중 어느 쪽이 더 풍요로울까? 

 

분명히, 자동차가 주거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대가 오고 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이 자동차의 개념 자체를 바꿔놓는 중이다. 전 세계의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이 주제로 펼쳐놓은 상상력의 결과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인간은 어딘가 속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다. 속한 곳에서 관계와 의미에 의지해 성장하는 게 인간이다. 여행이 설레는 건 우리가 속한 곳을 ‘일시적으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여행이 행복일까? ‘정처 없다’는 말은 왜 ‘떠돈다’는 말과 한 팀일까? 떠도는 삶에 안식은 없을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미래 모빌리티의 디자인 그 자체일 것이다. 전기차 디자인의 장르적 특성, 완전 자율주행의 자유가 움직이는 거주 공간에 대한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해줬다. 모두가 정면을 응시할 필요가 없고, 지금보다 훨씬 넉넉한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동과 거주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 그런 차를 한 대 갖는 게 아무리 비싸도 서울이나 도쿄, 뉴욕의 아파트보다 비쌀까. 그야말로 주거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룸 정도의 공간이라면. 게다가 ‘원룸 모빌리티’를 소유한 사람끼리 필요에 따라 단기간 정착하면서 각종 유지보수를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허브까지 갖춰져 있다면. 그 인프라는 ‘단기적 도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모빌리티를 청결하게 유지하고, 충전하며, 거기서 만난 사람들끼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목과 소속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다소 로맨틱하고 역설적인 소속감이랄까?

 

하지만 각자의 삶이 원룸 규모를 벗어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존재니까…. 마음속에는 지금보다 살짝 나쁜 삶에 대한 공포와 지금보다 훨씬 호사스러운 삶에 대한 욕망 또한 공존한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무르고 싶은 안정이 같이 있다. 도시를 떠나서는 못 살면서 내내 자연을 꿈꾼다. 그러니 창밖으로는 한강이 보였으면 좋겠다. 집에는 화분을 들인다. 정원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초고가 아파트와 빌라에 테라스와 발코니는 필요조건이 되었다. 통창을 열고 나가면 자연이 내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러니 미래도 이율배반일 것이다. 좋은 집을 한 채 갖고, 평일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주말에는 교외 어딘가의 허브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일종의 캠핑 허브라면 어떨까. 거주 편의성은 그대로 갖춘 모빌리티를 타고 집이 아닌 곳에서 낭만을 만끽하며 주말을 보내는 삶. 북쪽으로의 육로가 뚫린다면 또 어떨까? 우리는 몇 개의 허브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럽 어딘가의 허브에 정착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이동 수단이 글로벌 공유 모빌리티 회사의 것이었으니 반납은 유럽 허브에 하면 될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비행기로 빠르게. 여행은 끝났으니 이제 집으로. 가족과 사회가 있고, 통창을 열면 계절과 닿고, 차고에는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차’가 용도에 따라 두어 대쯤 있고, 개인의 역사와 취향이 그대로 묻어 있는 그곳으로. 
정우성(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더파크 대표)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주 잠깐 밴라이프를 꿈꾼 적이 있었다. 태양전지 패널이 달린 모터홈을 타고 뛰뛰빵빵 강산을 누비고 늦은 오후 석양이 질 때쯤 맥북으로 톡톡톡 원고(무슨 원고인지는 모르겠다)를 쓰며 사는 인생. 캬, 이보다 낭만적일 수 없지 않은가? 꽤 오래전 캠핑에 잔뜩 심취한 친구 하나가 카라반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 1박을 체험해본 이유다.

 

한우 등심을 비장탄에 구워 차갑게 식힌 맥주와 함께 삼키고, ‘불멍’을 때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낸 첫날 밤까지만 해도 나의 밴라이프 드림은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꿈이 퇴색된 건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였다. 친구의 가족과 나는 전날 밤에 먹은 것들을 열심히 비워내기 시작했고, 당연히 처리가 필요했다. 오수통을 빼서 인적 없는 화장실을 찾아 떠돌았던 과정을 길게 설명하진 않겠다.

 

그때 온몸으로 느꼈다. 정기적으로 오수통을 비워야 하는 삶에 낭만 따위는 없다고. 2019년에 이미 캠핑 인구는 600만을 넘겼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자. 왜 아직 4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캠핑에 빠지지 않았을까? 나는 그 4000만 명 중 다수가 캠핑 혹은 밴라이프의 낭만이 주는 감정적 여흥보다 오수통으로 대표되는 불편리(不便利)를 더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모터트렌드>에서 “미래엔, 집과 땅은 소유하지 않고 자동차에서 삶을 영위하는 노마드 라이프가 보편화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절대 그럴 일 없다”며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은 건 바로 그런 이유다. 말이 좋아 노마드 라이프지, 결국은 밴라이프의 미래 버전일 뿐이다. 자율주행으로 움직이는 밴을 타고 템퍼 페딕이 깔린 침대에 누워 출근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오수통과 모기와 바퀴벌레는 사라지지 않는다. 

 

둘 중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모빌리티의 미래는 “집과 땅은 있지만 자차가 없는 삶”, 즉 공유 모빌리티가 보편화되는 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가구마다 1대 이상의 승용차를 소유하는 건 정말이지 물자와 자원 낭비이기는 하다. 다만 ‘공유’라는 허상이 단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의 저자 알렉산드리아 래브넬에 따르면 에어비앤비는 결국 숙박업이고, 우버와 리프트는 택시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쏘카’는 결국 초단기 자동차 렌트 서비스로, ‘우버’는 택시 잡기 힘든 시간에만 이용하는 고급 택시로 변질됐다. 공유 모빌리티 역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변질의 압력을 받을 것이 분명한데, 그 압력을 이겨내고 공유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자동차가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베블런 효과의 영향을 받는 대표적인 사치재라는 점 역시 공유의 환상을 가로막는다. 아파트와 자동차의 브랜드는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이걸 포기하고 ‘함께 타는 차’가 보편화될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볼 때 주차나 차 관리가 필요 없는 ‘프리미엄 차 배달 서비스’의 형태로 시작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가입비와 서비스 구독료가 고급 차량의 유지비를 훨씬 상회하는 럭셔리 서비스로 접근해 ‘공유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부자’라는 인식이 생기도록 해야 사업 아이템으로서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능성 높은 모빌리티의 미래는 아마 ‘커넥티비티’의 세계일 것이다. 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는 2015년에 이미 미국의 GPS 기반 내비게이션 시스템 웨이즈를 예로 들어 모빌리티 알고리즘의 발달을 3단계로 나눠 설명한 바 있다.

 

첫 단계는 신탁, 두 번째 단계는 대리인, 세 번째 단계는 주권자다. 코엑스에서 신사역 사거리까지 가는 경로를 가르쳐달라고 알고리즘에 물었을 때 ‘직진 후 신논현역에서 한 번 우회전하는 게 거리는 가깝지만, 교통량 때문에 학동역과 논현역을 거치는 게 더 빠르다’고 답하는 수준이 바로 신탁의 단계다.

 

신탁 단계에서 알고리즘은 옵션을 제시할 뿐 선택은 휴먼이 한다. 자율주행 기술이 더 발달해 알고리즘과 연동되고 신뢰가 깊어지면 대리인의 단계로 발전한다. 사용자는 “두레국수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가줘” 내지는 “두레국수까지 온실가스 배출이 가장 적은 길로 가줘”라는 명령을 내리고 알고리즘의 선택을 믿고 따른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공유 모빌리티’의 단계가 되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알고리즘이 ‘주권자’의 권위를 확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선 중앙집권화된 알고리즘 모빌리티의 흐름에 따라 개별 차량의 경로를 임의로 지정한다. 안국역에서 동부이촌동까지 갈 때 3호 터널을 지나 강변북로를 타는 길을 A라 하고, 통일로를 타다 좌회전하는 길을 B라고 하자. A길은 막히고 B길은 막히지 않는다. 신탁과 대리인 단계의 내비게이션이라면 B길로 가라고 추천할 것이다.

 

그러나 주권자 단계의 내비게이션은 모든 차량에 B루트를 지정해 B루트가 막히는 사태를 막기 위해 길찾기 요청을 보낸 사용자를 임의로 나눠 A루트와 B루트에 적절히 배치한다. 이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다. 사용자는 A루트로 가는 길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사사로운 의혹을 고이 접어두고 알고리즘이 지정한 B루트로 차를 몰아야 한다.

 

인간은 과연 알고리즘이 의지를 빼앗아가는 단계를 받아들일 것인가? 참고로 나는 오늘 동부이촌동까지 3호 터널을 타고 가라는 티맵의 제안을 거부하고, 잔뜩 빨간색이 칠해진 통일로를 탔다. 티맵이 분명 막힐 거라고 경고한 통일로는 전혀 막히지 않았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셈이다.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미래 모빌리티, 노마드, 공유 모빌리티, 자동차, 모터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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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장은지PHOTO :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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